사도신경 강해 (11) -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사도신경 강해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0 ratings
· 3 views
Notes
Transcript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한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저리로서 산자와 죽은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성령을 믿사오며,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아멘.
서론
우리 청년부 2024년 표어 종종 여러분 보고 계십니까?
모이면 살고, 흩어지면 살리는 공동체입니다.
이 표어의 전반절 내용, “모이면 살고”의 내용이 자연스럽게 전제하고 있는 것이 바로 오늘 사도신경의 내용입니다.
우리는 “모이는 공동체”입니다.
그리고 그 모이는 공동체를 우리는 교회라고 이름합니다.
그리고 그 교회에 대한 고백이 바로 오늘 사도신경의 고백입니다.
PPT
교회에 대한 고백은 두 가지의 문장이죠.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이 두 가지 교회에 대한 신앙 고백을 가지고 오늘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서양에서 시작됐지만, 지금 우리나라에도 큰 영향을 미치는 어떤 가치관이 있습니다.
그것은 “개인주의적 가치관”입니다
PPT
이 개인주의적 가치관이 교회 공동체에도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는데, 저는 그중 하나가 바로 “소비주의적 신앙 태도”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개인주의적 가치관 자체가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개인주의적 가치관이 현대인들의 신앙과 교회에 대한 이해를 왜곡하고 있는 것은 확실하다고 생각합니다.
소비주의적 신앙 태도란 무엇일까요?
내가 영적인 소비자가 되고 쇼핑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원하는 영적인 소비품을 쇼핑하는거죠.
예를 들어 내가 설교 소비자면, 좋은 설교자를 택해서 소비하는 것이죠.
혹은 찬양팀 소비자면, 좋은 찬양팀을 선택해서 소비하는 것입니다.
혹은 공동체 소비자면, 좋은 공동체를 선택해서 소비하는 것이죠.
이러한 신앙의 태도가 왜 신앙과 교회에 대한 왜곡을 가져옵니까?
하나님의 부르심 이전에 나의 선택이 중요해집니다. 그리고 이로 인해 나의 영적인 만족이 나의 선택으로부터 비롯된다는 생각에 빠지는 것이죠.
그래서 하나님의 부르심, 하나님이 이끄시는 것을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선택을 가장 중요시 여기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요 신앙인의 가장 기본 태도는 “하나님께서 이끄시는 곳으로 간다”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소비주의적 신앙 태도가 결국 교회를 무너뜨리고 있습니다.
교회가 자신의 소비 관점에서 만족되지 않으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이 교회라는 곳도 자신에게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태도가 처음에는 교회에서 자신이 원하는 예배만 드린다던가, 혹은 자신이 있고 싶은 시간만 교회에 있는 이런 식으로 시작되다가, 점점 극단으로 치닫으면 만족이 되지 않아서 교회를 옮기거나, 교회를 옮겨서도 만족이 안 되면 일명 신앙은 있다고 하지만 교회를 나가지 않는 ‘가나안 성도’가 되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계획에 의해 교회를 옮기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현대인들이 교회를 옮기거나하는 경우에서 과연 하나님의 계획에 의해 진행되는 경우는 몇 퍼센트나 될까요?
저는 그러한 경우는 많지 않다고 생각하고, 대부분의 경우는 소비주의적 태도에 의해서 진행된다고 생각이 듭니다.
여러분 오늘의 신앙 고백의 내용은 정말 매우 중요합니다. 개인주의적 가치관, 소비주의적 신앙 태도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 이 신앙 고백의 단단함이 갖춰지고 교회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그 안에서 큰 은혜를 누리기 소망합니다.
1. 거룩한 공회와
“거룩한 공회”가 무엇인가요? 여러분은 사도신경을 고백하면서 공회가 뭔지 궁금해하신적 없으신가요?
PPT
거룩한 공회는 영어로 보면 “the Holy catholic church” 입니다.
거룩한 카톨릭 교회?
여러분 우리는 거룩한 카톨릭 교회를 믿습니다!
여러분 깊은 곳에 내재된 개신교 dna가 이 고백에 대해 이상함 혹은 어떤 분들은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카톨릭 교회를 믿는다뇨? 카톨릭은 로마 카톨릭, 그러니까 성당 교회 아닌가요?
PPT
여기서 카톨릭은 우리가 아는 로마 카톨릭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카톨릭의 어원은 그리스어의 Katholikos으로부터 나왔습니다.
뜻은 ‘보편적인’이라는 뜻인데요.
그렇다면 카톨릭 처치의 의미는 무엇인가요? “보편적인 교회”를 의미합니다.
거룩한 공교회라고 번역된 신앙 고백의 의미는 “거룩한 보편적인 교회”입니다.
교회는 네 가지 속성이 있습니다.
유일성, 거룩성, 보편성, 사도성
이 중 오늘 고백은 주로 유일성, 거룩성, 보편성이라는 특징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중 유일성과 보편성에 대해서 설명하려고 합니다.
PPT
여러분 교회가 유일하다는 말에 동의하시나요?
교회가 유일하면 길벗교회든, 저 옆에 하림교회든, 예수인교회든 왜 이렇게 나뉘었나요?
PPT
심지어 우리나라 안에서만 해도 교단들이 나뉘었는데 우리는 유일한가요?
네 유일합니다.
우리 교회의 유일성은 눈에 보이는 교회들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교회의 본질에 근거합니다.
눈에 보이는 교회들은 시간적, 공간적 혹은 신학적 이유로 나뉜 것처럼 보이지만, 이들은 말씀의 반석 위에 세워진 교회로서 하나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유일한 교회를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비가시적 교회”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PPT
이 눈에 보이지 않는 교회를 정의하면 “구원받은 성도들의 총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눈에 보이지 않는 교회는 시간과 공간에 구애받는 눈에 보이는 교회가 아닙니다.
창조된 이래로 온 역사를 통틀어, 지역과는 상관없이 하나님을 창조주이며, 구세주로 믿는 모든 성도들을 “하나의 교회”라고 말합니다.
만약에 아담과 여러분이 무슨 연관이 있는 것입니까?
하나의 교회, 유일한 교회로서 아담도, 우리도 하나의 교회에 속한 자들입니다.
왜냐하면 아담도, 우리도 구원받은 성도들의 총수에 들어가는 자들이니까요.
그리고 보편성은 무엇인가요? 그러한 유일성에 기반해서 구원받은 성도들이라면 성별, 계급, 나이, 인종 등과 상관없이 모든 자들이 교회에 속하게 되는 속성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교회는 유일하고, 보편적입니다.
지금 이 순간 지구 반대편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을 향해 예배드리고 있는 성도들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유일하고 보편적인 교회인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공교회”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PPT
여러분 로마 카톨릭 교회는 교회에 대한 관점이 우리의 이해와 다릅니다.
로마 카톨릭은 무엇을 오해했냐면, 이 보편성과 유일성에 대해서 오해했습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교회가 보편적이고 유일하다는 속성을 실제 우리 눈에 보이는 가시적 교회에 적용시켰습니다.
그래서 지금 로마 카톨릭을 이해하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로마 카톨릭 교황청이 있는 로마 바티칸의 카톨릭 교회나, 한국에 있는 카톨릭 교회나 똑같은 로마카톨릭에 속한 교회입니다.
비가시적 교회에 대한 이해 없이 가시적 교회에 유일성, 보편성을 적용하면 이런 실수를 나을 수 있습니다.
적용)
여러분 우리는 개인주의적 가치관이 만연한 가운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교회에 대한 신앙 고백은 어떤가요?
교회는 “구원받은 성도들의 총수”입니다.
이미 교회는 부르심받은 시점부터 “구원받은 성도들의 공동체”로 정의되고 있습니다.
개인주의적 가치관 속에서 생각한다면 개인주의적 가치관에서 판단의 주체는 누구죠? 그것을 우리는 “자아”라고 얘기합니다.
개인주의적 가치관 안에서 모든 판단의 주체, 생각과 인식, 느낌과 정서 모든 것들을 경험하고 판단하는 최소 주체를 우리는 “자아”라고 표현하죠.
이 “자아”는 “나”를 의미하고 개인주의적 가치관 속에서 “나”는 최소 판단 주체로서 “나를 중심”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그런데 여러분 성경이 말하는 바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개인적으로 부르심과 동시에 우리를 교회로 귀속시킵니다.
교회는 어떻죠? 이미 부르심부터 공동체로, 공교회로 부르심 받게 된 자들입니다.
그리고 이 교회는 자아들을 따로따로 교회로 세운 것이 아니라, 개개인 자아들을 다 모아서 하나의 유일한 교회로 세웠습니다.
각자 각자 자아가 모였고, 성별, 계급, 나이, 인종 등의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보편적인 교회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그 사실 하나로 우리는 하나의 유일한 교회가 됩니다.
그래서 저는 이러한 얘기를 하고싶습니다.
여러분이 개인으로 부르심 받았고, 교회로 부르심 받았다면, 여러분의 판단 주체는 개인만이 있는 것입니까? 교회가 있는 것입니까?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여러분 혼자 부르심 받아서 혼자 구원받는 것이라면 여러분에게 판단 주체는 자아만이어도 되겠죠.
PPT
그런데 여러분 혼자 부르심 받았나요? 아니잖아요. 교회가 함께 부르심 받았다면 우리의 판단 주체는 자아뿐만 아니라 ‘교회아’이기도 한 것입니다.
우리는 자아가 중요시된 사회 속에서 자아가 존중받는 것을 최대의 가치로 말합니다.
그런데 이 사회의 큰 문제들의 원인이 뭐냐면 “자아 비대 현상”입니다.
자아가 너무 비대해져서 문제들이 발생합니다.
PPT
여러분 교회에서는 자아뿐만 아니라 교회아 의식이 동시에 존재해야 합니다.
우리가 ‘나’뿐만 아니라 ‘교회’로 부르심 받았기 때문이에요.
여러분의 판단과 감정 이성 모든 인격적 존중과 함께 교회 모든 지체들의 인격적 존중이 가야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우리는 기독교의 최대 가치가 비로소 나오게 되는데, 그것은 희생과 사랑입니다.
교회는 자아뿐만 아니라 교회아가 함께 존중되면서 희생과 사랑의 열매가 맺어지게 됩니다.
여러분 옆에 있는 지체가 없으면 사랑과 희생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개인으로 부르심 받았습니까? 교회로 부르심 받았습니까?
여러분이 진정한 성도라면 둘 다에 부르심 받았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2.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이제 두 번째 중요한 교회에 대한 신앙 고백으로 넘어가려 하빈다.
교회는 유일하고 보편적인 교회입니다.
이것은 외부에서 봤을 때 교회의 모습이 이렇다는 고백일 수 있겠죠.
두번째 교회에 대한 고백은 내부에서 교회를 봤을 때 일어나는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교통” 입니다.
그리고 오늘 설교 안에서 이 “교통”이라는 말 대신 “교제”라는 말을 사용하려고 합니다.
PPT
교회 안에서의 교제는 두 가지 측면에서 일어나게 됩니다.
(1) 눈에 보이지 않는 그리스도 안에서 신비한 교제
먼저 눈에 보이지 않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되는 신비한 교제입니다.
이 교제에 대해서 말하려면 이 말씀을 빼놓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 공동체의 표어 말씀이기도 하고, 수련회 때도 다루었던 말씀이기도 한데요.
요한1서 1:1–3 NKRV
1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2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언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이시니라 3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
우리의 교제는 본질적으로 무엇으로부터 시작되나요?
생명의 말씀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생명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죠.
여러분 우리의 교제의 시작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성도의 구원을 뭐라고 얘기하냐면,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고 얘기합니다.
성도는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고, 이제 예수님이 포도나무가 되시고, 우리는 가지가 되어 예수님이 없이는 내가 살 수 없는 상태가 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와의 연합입니다.
우리의 영생의 그 생명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나무로부터 영양분이 와서 유지되게 됩니다.
그런데 그 나뭇가지가 나라면, 나뭇가지들은 무엇입니까? 바로 교회입니다.
PPT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나무에 딱 달라붙은 나뭇가지들입니다.
그래서요 교회 안에서 교제는 예수 그리스도 없이 이루어질 수가 없습니다.
교제는요 교회 말고 다른 공동체에서도 항상 이루어지거든요.
모든 공동체에서는 서로간의 교제, 소통이 있어요.
그런데 교회의 교제가 여타 공동체와 다른 유일한 한 가지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한 나무에 붙은 나뭇가지가 된 사람들이 교제할 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교제하게 되는 것.
이것이 아름다운 교회의 교제의 신비입니다.
PPT
(2)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교제
이렇게 눈에 보이지 않는 교회의 신비로운 그리스도와 연합으로 이루어지는 교제가 일어납니다.
그 이후 이 교제로 인하여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교제가 이루어지게 됩니다.
이 교제는 성경에 기록된 초대교회의 모습 속에서 충만히 나타납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연합하여 신비로운 교 제가 이루어졌던 초대교회에서 구체적인 교제가 일어나게 되는 것이죠.
그 내용이 사도 행전 2장에 나오게 됩니다.
사도행전 2:42–47 NKRV
42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43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말미암아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44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45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46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47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서로 기도하고요, 믿는 사람이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함께 떡을 떼고 음식을 먹고 찬양합니다.
여러분 이것이 이제 구체적으로 나타나는 교제의 모습이에요.
이 모습을 보면요 여기서 도대체 어떤 모습이 소비주의적인 신앙의 모습이 나타나는지 정말 모르겠습니다.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된 공동체에서 나타나는 모습은 철저하게 “교회아 의식 중심”으로밖에 안 보입니다.
내가 가지고 있던 것들을 가지고 모아 와서 함께 나누고 교회아 의식을 가지고 교제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에서 음식으로 나눔이 나타나는데, 이 음식이라는 것 안에는 큰 상징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음식이란 육체의 생명을 연장시키 것이죠.
여러분 교회의 교제에는 우리의 영혼의 생명을 서로 연장시키는 나눔이 존재합니다.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모습으로 나타날 때 우리의 육체뿐 아니라 우리의 나눔과 교제 가운데 영혼의 성장과 성숙이 일어나는 거에요.
예수 그리스도에게 붙어있어서 영생의 생명을 얻게 됩니다.
그러나 동시에 교회의 교제를 통해서 영생의 생명을 공급받게 됩니다.
적용)
여러분 우리의 교제가 다른 공동체와 다른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리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있기 때문이에요.
그리고 그 예수 그리스도가 함께 있어 일어난 구체적인 교제에는 영혼의 생명이 공급되고 성숙해지는 놀라운 일이 일어나게 됩니다.
여러분들 목장 모임 가운데 어떤 믿음을 가지고 교제하십니까?
목장 모임이 아니더라도, 여러분들이 교회의 이름으로 모이는 모든 곳에서 어떤 믿음을 가지고 교제하십니까?
오늘 사도신경의 믿음의 고백은 “우리가 교제할 때 예수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이 공급된다”라고 고백합니다.
우리는 모이면 사는 공동체에요.
우리가 교회의 이름으로 모였을 때 우리는 산다니까요.
저는 이미 항상 믿어왔고, 그것을 표어로 정했던 것입니다.
여러분들 모임 가운데, 교제 가운데 생명이 공급되고 있습니까?
혹은 생명을 단축시키고, 영혼이 피폐해져가는 교제가 되고 있습니까?
여러분들이 모이는 모든 교제의 모임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가 있습니까?
안타깝게도 많은 교회의 교제 모임 가운데 생명이 살아나고, 공급되는 교제 모임을 찾아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여러분 제가 어떤 분이 쓴 글을 보는데, 그분은 교회를 안 나가는 이유가 교제 모임 때문에 안 간다는 거에요.
그분이 어른이신데 우리 목장모임 같은 소그룹 모임을 들어간 겁니다.
그런데 거기서 이뤄지는 교제의 내용들이 자신의 영혼의 생명이 되는 것이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거죠.
집값 어디가 올랐다는 이야기, 애들 대학 이야기, 연예인 이야기는 가득한데 말씀 이야기도 없고, 예수 그리스도를 느낄 수가 없ㄴㄴ거에요.
그러한 얘기들 속에서도 그들의 삶을 통해 예수님의 가르침이 드러나야 하는데 아무 것도 느낄 수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너무 안타깝지만, 우리 가운데도 그러한 모습이 충분히 있을 수 있습니다.
저는 목장 모임만이 교제 모임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모이는 청년부 예배도 교제 모임입니다.
혹은 사적으로 모이는 모임도 교제이고요.
1:1로 만나는 저와의 심방이나, 목자들의 심방도 교회의 모임입니다.
그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있습니까?
그 삶 안에 예수님의 가르침이 있습니까?
우리가 맞닥뜨리는 삶의 문제를 외면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삶의 문제 가운데 예수님의 가르침을 녹여내려는 노력이 있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분명히 우리 공동체는 서서히 균열이 일어나기 시작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없으면요 생명이 메말라가기 때문에 그 공동체 전체는 생명이 메말라갈 거에요.
저와 함께 목자 부목자 분들 또한 모든 우리 청년부 공동체 여러분
예수님을 삶에서 살아내며 교제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삶의 문제가 닥쳐왔을 때 예수님의 방식은 무엇인지 고민하지 않겠습니까?
그 가운데 예수님을 믿는 자의 삶으로 권면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우리 공동체의 참된 교제를 위해 그러한 공동체가 되지 않으시겠습니까?
결론
말씀을 맺겠습니다.
Related Media
See more
Related Sermons
See more